Q. ‘수월한 침묵과 자멸적 용기의 갈림길’에서 고민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 : 지금은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초등학교 1인 1기 시간에 다른 반의 특수반 친구와 짝꿍이 되어 1년간 같이한 적이 있었다. 하필 앞자리에 앉은 남자아이들이 장난기가 많고 나쁜 친구들이었어서 매주 내 짝꿍을 괴롭혔는데, 나서서 말리지를 못했다. 딱 한번 그 아이들이 짝꿍의 필통을 복도로 던져버렸을 때 지금 뭐하냐는 말 한마디밖에 하지 못했다. 그때의 시간들이 오래오래 마음에 남는다.
🌵 : 누군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가치관의 차이가 느껴질 때 침묵을 지키는 일은 너무나도 쉽다. 그 사람을 설득하거나 타인을 옹호하려는 의도를 꾹 참고 입을 다물면 문제가 없이 상황이 종결되기 때문이다. 대화하다가 정적이 흐르는 모습을 만들기 싫어서 침묵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4호선을 주로 이용하다보니 주변 지인들의 전장연 시위와 관련한 불만을 종종 듣곤 했다. 어떤 말을 얹어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단 생각에 아예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거나 주제를 돌리곤 했다. 수월한 침묵을 택한 것이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와의 가치관의 차이가 느껴질 때 침묵을 지키는 일은 너무나도 쉽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을 설득하거나 타인을 옹호하려는 의도를 꾹 참고 입을 다물면 되니까. 어쩌면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과 논쟁을 벌이는 것보단 불특정다수에게 생각을 전달하고 공유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기도 한 것 같다. 온라인으로 글을 공유하고 블로그에 적는 것은 용기라고 느껴지지 않을만큼 자연스러웠으니까.
🎉 : 최근의 일들로 인해 평소보다 언론 기사를 많이 보고 있다. 한 기사의 댓글을 보다가 이런 말을 발견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악은 그렇게도 쉽게 총칼과 탱크로 창문을 깨고 침입하는데, 어째서 선은 추운 바닥에서 긴 시간을 버텨내야만 하는가.
‘안다’는 일은 때로 정말 괴로운 일이다. 몰랐다면 더 편했을 것이다. 펄롱과는 다른 남자들처럼 “미사 마치고 맥주 한두 잔 마시면서 쉬고 즐기고 저녁 배부르게 먹고 불가에서 신문을 보다가 잠들(93p)”기도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그동안 읽은 책과 들어온 강의들이 내게 시야와 생각을 주었다면, 나는 더 멀리 보고 더 깊이 느끼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충동과 욕망들이 세상의 고통을 만들어내고 있다.
교실 안에서, 대화 속에서, 화면 너머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이 있다. 인간의 손은 타인의 손을 잡을 수도 있지만 타인의 뺨을 내려칠 수도 있다. 그 앞을 막아 서고 위험을 나누어 갖는 것은 분명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일과 ‘나’의 일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놓이는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써보지 못한 용기를 부끄러워하는 밤을 보내고 싶지 않다.
결국 이는 모두 나를 위하기도 한다. 언제나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하지 않았던 스스로를 본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위험을 조금 나누어 갖는다.
🐬 : 늘 고민한다. 수월한 침묵과 기계적 중립이 가져다주는 현상 유지, 그 안온한 일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안도감. 그리고 자멸적 용기가 불러일으킬 파급 효과에 대헤서. 사회적 이슈에 대한 내 의견을 피력하는 것, 그리고 내 의견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어떤 이점을 가져다주고 또 어떤 불이익을 수반할지 계산하게 된다. 이는 ‘나’라는 주체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안정적 기반을 유지하는 것을 선택할지, 그 근간을 뒤흔들면서도 신념을 고수할지에 대한 문제로 변용되기도 하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 : 일상에서 우리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어마어마한 정치 논쟁에 연루되지 않더라도 조금의 안락함과 배려의 갈림길에서 고민한다. 매일 아침 출근길, 회사 혹은 학교로 향하는 버스엔 언제나 사람이 북적인다. 그런데 한 임산부가 짐을 이고 버스에 올라타신다. 앉을 자리는 없고 어쩜 딱 내 앞에서 멈춰신다. 그녀가 잠시 원망스러움에도 난 자리를 양보한다. 약자를 배려하는 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공동의 약속이다. 비록 30분을 더 가야 하는 거리이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홀가분한다. 소폭이나마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건 법도, 정책도 아닌 그저 사람들의 양심이다.
🕯️ : 타인에게 이유를 묻고 싶을 때가 가끔 있다. 그때 왜 그랬는지 따위의 질문 같은 거다. 답에 대한 호기심이 잔뜩 차올라 있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다. 혀끝에서 질문이 맴돌아도 참는다. 한참을 묵혀둔 의문이 사라지면 허전하지 않겠는가. 차라리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낫다. 그렇게 나만 아는 삶의 깊이를 만드는 거다.
이렇게 결론 짓기는 했어도 늘, 공백을 견딜 용기를 택하고 싶다. 지금은 갈림길이 모인 곳에서 서성일 뿐이다.
☔ : 변화를 싫어하고 흘러가는 대로 살자는 정신에 따라 수많은 상황에서 침묵을 택해 왔다. 그럼에도 양심에 찔리긴 했는지 침묵과 용기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물렀던 경험이 떠오른다. 수월한 침묵과 자멸적 용기 사이에서의 고민이라기엔 부끄러운, 아주 작고 유치한 이야기이다. 어리고 철없던 시절, 동네에서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농구를 즐기던 시절이었다. 인원이 늘어나는 걸 꺼려하던 운동 모임의 친구들과 같이 운동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던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기로에 서 있었다. 모임에서 내 자리를 유지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는지 다른 친구들을 부르기보다 새로운 운동 모임을 만들어 운동하는 어중간한 해결책을 택했다. 침묵은 싫었고, 용기내기에는 잡생각과 걱정이 너무 많았으므로. 대가가 이렇게 별것 아닌 일에도 쉽게 용기를 택하지 못했다.
📌 : 넓게 본다면 인생의 대부분이 크고 작은 이 고민 속에서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배달 음식 하나를 먹는 것에서도 환경오염을 생각할 것인가, 편함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든다.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느낄수록 선택의 순간 속에서 매번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