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책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나 문장은 무엇이었나요?
🍉 :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러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 : “펄롱은 트럭에 올라타자마자 문을 닫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가, 길을 잘못 들었으며 최고 속도로 엉뚱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가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바닥을 기어다니며 걸레질을 해서 마루에 윤을 내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모습이 계속 생각났다.”
수녀원에서 나와 차를 타자마자 길을 잃는 펄롱의 머리에는 아직도 아이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펄롱이 어떤 인물인지 잘 보여주는 장면 같았다. 타인을 외면할 수 없는 펄롱의 성향을 잘 드러낸 장면 같아서 기억에 남는다. 이후 펄롱이 길가의 노인에게 올바른 방향에 대해 묻자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라는 말을 듣는다. 펄롱은 진짜 ‘길’을 묻고자 했던 것이 아니기에 아이를 데려가기로 결심한 것 아닐까 싶었다.
🎉 :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책 말미의 구절에는 삶의 핵심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꾸만 ‘나’를 생각하고,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타인을 위한 작은 마음 하나 내어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타인과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는 이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과 적극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일은 결국 그 속에 선 스스로의 존재를 단단하게 하는 일이다. 당당하기 위한 일이다. 홀로 산다는 감각을 떨치기 힘들지만 결국 우리는 서로 어깨를 맞대고 산다. 곁의 사람들이 무너져 내리는 일에 침묵한다면, 곧 나는 춥고 초라한 자리에 서 있게 될 것이다.
🐬 :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러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 :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 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소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 들이 한 데 합해쳐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 :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 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 —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석탄과 땔감을 팔아 돈을 받고, 사람들과 척지지도 않고 적당한 관계를 맺는 건 평범 중에서도 모범적인 삶이다. 자라날 적에도 삶이 모범과 비슷했다면 지금의 삶에 의문을 던질 이유가 없다. 나의 사소한 것들이 가리키는 방향과 내가 살고 있는 삶의 방향이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데로 튀어 있는 사소함은 그것을 거부한다. 펄롱이 어머니를 잃고 미시즈 윌슨의 보호 아래 있었던 것이 그 예다. 불쌍한 아이에게 선의를 베풂은 위에서 짚은 모범적인 삶에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펄롱의 사소한 것은 척지지 않는 것 이상의 호의를 향해 있다. 펄롱은 이전을 반추하며 삶의 방향과 다르게 나아가는 사소한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사소한 것의 방향을 따라갔다.
펄롱이 기쁨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우리 역시 시도해 볼만하다. 나를 분해하고, 사소한 것을 말이 되게 규명하고, 내 과거를 이유로 내보이며 하고 싶은 일을 택하는 것이다. 각자를 이루는 사소한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이끄는 대로 발 디디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 “속이 빈 자루는 제대로 설 수가 없는 법이지.”(p.14)
옮긴 이는 이 책을 두 번 읽어야 알 수 있는 것들,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다시 돌아간 소설의 도입부부터 이를 실감했다. 어쩌면 펄롱의 고뇌, 고뇌 끝에 다다른 선택의 이유가 담겨 있는 문장이 아닐까. 제대로 서서 나아가는 펄롱의 발걸음에는 무게가 실려 있으리라.
📌 :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119p.
책의 모든 말들이 이 문장으로 나아가기 위한 서사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강의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서사적 필연성"이 이 소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보인다. 다만 이 문장들이 영화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필연을 형성하는 많은 문장이 상념의 서술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번역이 상당히 절제되었다는 느낌을 받아서, 원어가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 책을 여러 번 읽으면서 문장의 짜임새를 느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