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책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혹은 문장, 그리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 : 239p. 이 모든 일(이 모든 일: 가차 없는, 형언할 수 없는 그것)이 먼 과거의 기억이 됐을 때는 과연 어떨지 알고 싶다. 더없이 강렬한 경험이 결국엔 얼마나 자주 꿈과 비슷해지는지, 난 늘 그것이 싫었다. 과거를 보는 우리의 시야를 온통 지저분하게 뭉개놓는 그 초현실적 오염 말이다. 실제 일어난 그토록 많은 일이 어째서 진짜로 일어나지 않은 듯이 느껴지는 걸까? 인생은 한갓 꿈일 뿐. 생각해보라. 그보다 더 잔인한 관념이 과연 있을 수 있나? 기억.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과거의 사건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표현할 다른 단어가 필요하다고, 그레이엄 그린은 생각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이 부분을 읽고 과거를 과거답게 대하는 법이 과연 있을까?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과거의 기억들은 과거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진영의 <홈 스위트 홈>도 생각나고.
🎉 :
“내가 아무리 기를 써봐야 언어는 전혀 만족할 만한 것이 못 되어서, 실제 벌어지는 현실을 결코 정확히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3부-1 중)
성실하지 못했던 대학 생활 끝에 내 뇌 속에는 지난 날의 배움이 정확한 학문적 성취 보다는 어떤 흔적이나 불문명한 경험 같은 것으로 남아 있다. 기표와 기의라거나, 라캉의 ‘미끄러짐’이나 데리다의 ‘차연’ 같은 개념들이 무척 흥미로웠던 것은 비교적 분명히 떠오른다.
학문적 개념으로 성립된 것들이나 <어떻게 지내요>의 위의 문장이나, 그리고 이 책을 덮으면서 든 생각이나 내게 같은 결론을 주었다. 살면서 중요하고 거대한 존재나 사실과 마주할 때마다 그것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도저히 떠올리기 어려웠다. 나는 주로 그것을 내 능력의 부족으로 여기곤 했는데, 동시에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언어로 표현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임을 깨달은 것이 요즘의 변화이다. 내가 부처는 못 된다만, ‘불립문자’라고나 할까.
나는 <어떻게 지내요>가 정말로 중요한 것을 다루려고 했기 때문에 조금은 혼란스럽게 읽히는 소설이라고 여기고 있다. 베스트셀러 자기개발서 만큼이나 ‘이렇게 해서 저렇게 하면 당신은 잘 살 수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면서 끝내길 바라는 것은 나의 욕심이다. 이 소설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아야 진정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그래서 어떡해?’에 답하기 이전에 우선 우리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을 인식하고 직시하는 일. 이 소설이 내가 그 일을 하도록 돕는, 당장 너무 가깝지는 않은 친구처럼 느껴졌다.
🐬 : 38~39쪽) 그냥 생각을 좀 하고 있었다고, 그가 말했다.
플로베르는 생각하는 것은 곧 고통스러움이라고 했다.
그건 느끼는 것은 곧 고통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같을까?
전 애인의 인류 종말과 개인적 관계에 대한 생각. 그러한 생각 자체가 가져다주는 고통. 그것을 응시하고, 또 집약해서 보여 주는 말이라 확 다가왔다.
167쪽)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헨리 제임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사람.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며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이 소설이 관통하는 주제를 명징하게 전달하고 있는 단락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넘어서 고통에 무감해진 세태의 풍광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사유이기도 하다.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보다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이 더 많은 지금, 그 당사자의 삶이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든 모두 지옥에 가까워지고 있지 않나.
213쪽) 그게 사는 거야. 그런 거야. 무슨 일이 있건 삶은 이어진다. 엉망의 삶. 부당한 삶.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 삶. 내가 처리해야 하는.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죽음과 접면해 있는, 최대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자세로 자신의 삶을 처분하려고 하는 친구의 발악과 동시에 내던져진 말. 이 발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삶 자체에 대한 본질적 사유를 잘 드러내 보이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 :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헨리 제임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사람.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며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 : 트레이너와의 대화 장면 (p.164-167) : 죽어가는 친구가 있다는 말에 대신 울먹이고 껴안아 준다. 자기관리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걱정해 준다.
잘 모르는 자의 과한 공감은 때론 불쾌하다. (주인공도 비슷하게 느낀 것 같았다) 사방이 막힌 내 방에 누군가 노크도 없이 불쑥 머리를 들이미는 것 같은 기분. 가식인지 연민인지 판별해내는 과정도 성가시다. 하지만 때론 성큼 들어오는 그 뻔뻔함이 얼마나 고마운지. 나를 잘 모르는 자의 스쳐 지나가는 공감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트레이너는 ‘어떻게 지내요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를 가장 잘 실천한 인물이다.
📌 :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Quel est ton tourment)?"
아무래도 많은 분 이 고르실 것 같아서 다른 걸 고르려고 했는데, 다른 문장들도 너무 좋지만 책의 핵심을 관통하는 이 단락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은 나를 둘러싼 타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모든 것, 그러니까 가까운 사람의 건강부터 먼 곳의 슬픔, 발 딛고 선 땅과 훗날의 아이에게까지 안부를 물어가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곳에 홀로 고립될 테니까요.
🕯️ : “헛된 희망에 절대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서 나 자신을 평생토록 용서할 수 없어.”
책 속의 교수는 세상이 나아질 가망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수긍할 만한 주장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되풀이한다. 마치 이번에는 다른 결과가 나올 거라는 확신을 품은 듯이 보인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 친구의 분노는 여전히 희망을 바라본 데 기인했다는 점에서 지독히 인간적이다. 극단 속 표출이야말로 우리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곳곳에 존재하던 회의와 희망에 넘어가고, 그것을 후회하고, 또 희망만을 보며 무언가를 저지르는 쳇바퀴 같은 각 인물의 상황이 맞물려 아직 살아 있는 자신을 고민하게 한다.
☔ : “다들 그런 식이야. 친구가 말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싸우기를 바라는 거지. 암에 대해 그런 식으로 배워왔으니까. 환자와 질병의 싸움이다. 곧 선과 악의 싸움이다. 행동에도 옳은 방식이 있고 그른 방식이 있다. 강한 대응과 나약한 대응. 투사의 방식과 포기자의 방식. 이기고 살아남으면 영웅이 돼. 지면, 글쎄, 아마 온 힘을 다해 싸우지 않은 거겠지.” (p.131)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환자와 질병을 분리시키고, 싸움의 구도 위에 올려놓는 응원의 방식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환자와 곁을 지키는 사람들의 모습, 그 사이를 오가는 표현들. 버티는 것보다 떠날 준비를 마친 사람 앞에 내가 서 있다면 과연 나는 ‘진부하고 상투적이지 않은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이런 대목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기적인 위로와 부탁 말고 내가 다른 말을 건네리라는 기대가 없다. 그래서 더더욱 겁이 너무도 많은 내가 이 장면을 오래 기억했으면 한다. 남겨지는 자라면 떠나는 자의 고통을, 떠나는 자라면 남겨지는 자들의 이기적인 위로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