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6. 11 형태소 페이퍼 17호
의미를 갖춘 가장 작은 단위인 형태소
행간 사이에 오래 머물며 마주한 생각을 나눌 예정입니다.
책을 읽고 싶은 분들 누구나 함께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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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5월의 자립형태소 돌고래입니다. 🐬
5월 동안 무탈하게 지내셨나요?
5월은 2025년의 큰 전환점이 된다는 SNS에서의 코멘트를 본 적이 있는데요.
실제로 지금 여기의 국면을 돌아봤을 때도 우리는 전환기의 상태에 놓여 있는 듯합니다.
이와 같은 변화를 맞이하며 형태소는 5월에도 시집 한 권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연습을 했습니다.
이번 17호 페이퍼에서는 지난날을 마무리하며 새로운 시기를 맞이할 때
읽기 좋은 시집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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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나무를 태우며
사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살았습니다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이 늙었습니다
너덜너덜 목 없는 빨래처럼 말라갔습니다
알아볼 수 있어 너무나 사무치던 몇몇 얼굴이 우리의 시간이었습니까
내가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살아 있습니까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가을달이 지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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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참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잠시 숨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가끔 발 바쁘게 움직였던 지하철 플랫폼에서 두고 온 인간 존재와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를 꺼내곤 하는데요. 그게 바로 허수경 시인의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다시 한번 펼쳐 읽을 때입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시간이 층층이 쌓인 존재인 '나'와 '너'에 대해서, 그리고 이 세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좋습니다.
출간된 지 벌써 9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동시대적 감수성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환기를 맞이하기 전, 작년 말부터 가쁘게 달려왔던 하루하루의 속도를 약간 늦추고,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아울러 사유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유의 깊이를 더해 줄 시집이 바로 허수경의 시집이라고 생각해서 5월의 책으로 선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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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자라고 대학 역시 그곳에서 다녔다. 오래된 도시, 그 진주가 도시에 대한 원체험이었다. 낮은 한옥들, 골목들, 그 사이사이에 있던 오래된 식당들과 주점들. 그 인간의 도시에서 새어나오던 불빛들이 내 정서의 근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밥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고 그 무렵에 시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봉천동에서 살다가 방송국 스크립터 생활을 하면서 이태원, 원당, 광화문 근처에서 셋방을 얻어 살기도 했다.
1992년 늦가을 독일로 왔다. 나에게는 집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셋방 아니면 기숙사 방이 내 삶의 거처였다. 작은 방 하나만을 지상에 얻어놓고 유랑을 하는 것처럼 독일에서 살면서 공부했고, 여름방학이면 그 방마저 독일에 두고 오리엔트로 발굴을 하러 가기도 했다. 발굴장의 숙소는 텐트이거나 여러 명이 함께 지내는 임시로 지어진 방이었다. 발굴을 하면서, 폐허가 된 옛 도시를 경험하면서, 인간의 도시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다. 도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이 지상에서 영원히 거처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사무치게 알았다.
서울에서 살 때 두 권의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을 발표했다. 두번째 시집인 『혼자 가는 먼 집』의 제목을 정할 때 그것이 어쩌면 나라는 자아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독일에서 살면서 세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내었을 때 이미 나는 참 많은 폐허 도시를 보고 난 뒤였다. 나는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했다. 물질이든 생명이든 유한한 주기를 살다가 사라져갈 때 그들의 영혼은 어디인 가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하기를 멈추고 글쓰기로 돌아왔다. 그뒤로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산문집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너 없이 걸었다』, 장편소설 『모래도시』 『아틀란티스야, 잘 가』 『박하』, 동화책 『가로미와 늘메 이야기』 『마루호리의 비밀』, 번역서 『슬픈 란돌린』 『끝없는 이야기』 『사랑하기 위한 일 곱 번의 시도』 『그림 형제 동화집』 『파울 첼란 전집』 등을 펴냈다.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 10월 3일 뮌스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고집으로 『가기 전에 쓰는 글들』 『오늘의 착각』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가 출간됐다.
-허수경, 「저자 소개」, 알라딘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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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시인의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 소개가 도움이 됩니다. 허수경 시인의 생전 마지막 시집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특유의 아름다운 문장과 고고학적 상상력, 그리고 인간과 삶에 대한 인식이 묻어나는 시집입니다. 진주에서 서울, 그리고 독일에 머무르며 고고학을 공부한 독특한 삶의 궤적은 개인의 삶과 죽음, 사랑과 폭력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지니게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인식의 배경이 된 이국의 삶 속에서 모국어로 시를 써 온 시인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출간한 시집이 바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입니다.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본질적 문제에 대한 사유를 개진해 나갑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사랑과 폭력의 뒤섞임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고통을 감각하는 시편들이 가득해요. 또한, 2부의 과일과 식물 시편들은 ‘너’와의 관계 속에서 깊이 새겨진 시간에 대한 인식과 감정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한편, 이국의 삶을 지속해 온 시인은 모국의 풍경 또한 주시합니다. 이때, 모국에서 폭력이 횡행한 장면들은 유럽에서의 전쟁과 종교, 그리고 난민들의 행렬과도 겹치는 것이기도 하죠.
시인의 삶의 내력, 시집에 묻어나는 고고학적 상상력, 그리고 시간에 대한 사유는 깊은 울림을 자아냈어요. 특히나, 지나간 과거와 내가 위치한 지금 여기, 그리고 도래할 미래에 대한 본원적인 생각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도식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내가 겪는 ‘시간’에 대한 질문을요. 그래서 저는 함께 시집을 읽은 형태소에게 ‘시간(성)’을 어떻게 감각하고 있는지, 최근 시간이 빠르거나 혹은 느리게 느껴졌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 거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봤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형태소의 대답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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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여러분은 ‘시간(성)’을 어떻게 감각하고 있나요? 최근 시간이 빠르거나 혹은 느리게 느껴졌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 거라고 생각하나요?
🐬: 시간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편인데도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에 대한 감각은 순간순간마다 다른 것 같다. 이를테면, 샤워를 하고 나와서 지금은 몇 분이 되었겠구나, 하는 것은 정확하게 파악한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느리게 간다’는 감각에는 편차가 있다. 요새 내 하루는 거시적으로 보면 빠르게 흘러가고, 특정 순간에서는 느리게 흘러간다. 학교-집-병원-집, 주말에는 아르바이트와 과외 수업. 이와 같은 경로를 바삐 따라가고 나면 금방 하루가 끝난다. 하지만 병원에 있을 때는 이 안에서의 시간은 물웅덩이에 고인 것처럼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입원한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병실에 들러서 간이 침대나 휴게실에 앉아 있을 때마다 그렇다. 특별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그저 옆을 지키는 게 전부이기 때문에.
🌵: 계절도 계절이지만 반려견과 함께 살아가게 된 뒤로는 털이 자라는 속도를 보고 시간을 체감하는 것 같다. 털이 언제 이렇게 빨리 자랐지? 싶어서.. 미용날짜를 확인해보니 벌써 삼 개월 전이더라고. 5월은 정말 빠르게 흘러간 것 같다고 느껴진다. 졸업 후 매일매일이 비슷한 날들을 보내는데도 시간이 왜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 시간은 동력이면서 위협이다. 세상은 정지해 있지 않고 누구에게나 흐르니까 시간은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한다. 시간을 흐름으로써 나를 키웠다. 인간의 내면은 단순히 ‘더 겪음’으로서 얻을 수 있는 단단함의 기회를 지니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혜택을 톡톡히 보았다. 그런데, 시간은 끝을 담보한다. 태양에게도 끝은 있다. 시간이 흐르는 매 순간 우리는 끝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언제나 시간은 무섭다.
시간은 공평하지만 시간에 대한 감각은 다시 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영역으로 돌아온다. 어떤 찰나는 영원히 삶을 지배하고 어느 긴 세월은 아무리 돌이켜도 희미하다. 4월 말 햇살 좋은 날에 읍내 공공도서관에 갔다가 도서관 입구 옆 커다란 나무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찍은 사진 등을 살펴보니 아무리 쳐줘도 10분도 있지 않고 나왔다. 작년에 했던 편의점 야간알바는 하루에 9~10시간 짜리였는데 길다고 느껴본 적이 드물었다. 따라서 시간의 체감은 내가 그 순간에 얼마나 의미를 부여하는가, 내가 그 순간에 얼마나 성의를 다 하는가에 달려있지 않나 싶다.
🕯: 하루는 느리고 그 이상의 단위는 금방 지나있다. 요즈음에는 아마 이어질 내일, 모레, 글피를 뭉뚱그리고 곧 예정된 사건만을 기다린다. 조금 버티면 종강이고, 여름이 끝나기 전에 친구들과 모일 테고, 올해 안으로 버킷리스트 몇 가지를 이루리라는 등의 정해진 어떤 것들이 마치 장막처럼 나중을 향한 시야를 가린다. 그 장막들을 응시하며 시간을 보내는 건 지루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깜빡 졸았다가 놀라며 깨듯이 달력을 보았을 때는 한 주가, 한 달이 흘러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됐다며 과거의 뒷맛을 슬쩍 맛본다.
📌: 요즘 시간이 빨라도 너무 빠르게 느껴진다. 이유는 명확하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할 일을 하는 시간은 소진되고, 그 사이 시간은 버려지는 기분이 든다. 시간의 흐름이 24시간의 시계가 아니라, To do 리스트의 항목처럼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휴식마저 항목에 넣는 중이다. 커피 마시면서 잠깐 쉬기, 벚꽃 사진 찍기 등등. 현대 사회에서 무용한 시간은 없는 시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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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성)에 대한 형태소의 답변, 잘 읽으셨나요?
나의 답변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 살펴보아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허수경의 시집에 담긴 시간(성)에 대한 사유가 더욱 궁금해지진 않으셨나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먼저 읽은 형태소의 한줄평은 다음과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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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서정성의 아름다운 결정체.
🌵: 부재를 견디는 순간이 응축된 단어들.
🎉: 숱하게 걸어온 길과 그토록 깊게 겪은 고독의 시간들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들이 내게 주는 저녁놀 짙은 산책길을 거닐 때에는 싱긋 웃고 싶어진다.
🕯: 비켜서서 바라본 무수한 하나.
📌: 아직 말하지 못한 것들로부터 우리는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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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소의 한줄평까지 읽어 보았는데요.
아마 시집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더욱 올라갔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6월에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읽으며
지나간 과거와 도래할 미래에 대한 생각을 떠올려보는 거 어떨까요?
앞으로의 시간을 후회 없이 보낼 수 있을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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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 어떠셨나요?
형태소가 소개한 책이 궁금해졌다면,
함께 읽으며 이 질문들에도 답을 찾아가보는 건 어떨까요?
- 1. 시집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았던 시나 구절이 있나요?
- 2. 위에서 답한 시와 구절이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3. 여러분은 ‘시간(성)’을 어떻게 감각하고 있나요? 최근 시간이 빠르거나 혹은 느리게 느껴졌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 거라고 생각하나요?
- 4. 시집을 읽고 난 후, 여러분이 여태까지 지나온 시간과 관계에 대해 생각이 변화한 부분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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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소의 열 일곱 번째 페이퍼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형태소 페이퍼>는
매달 둘째주, 넷째주 목요일에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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