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8. 08 형태소 페이퍼 1호
의미를 갖춘 가장 작은 단위인 형태소
행간 사이에 오래 머물며 마주한 생각을 나눌 예정입니다.
책을 읽고 싶은 분들 누구나 함께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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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7월의 자립형태소 서로입니다. 🌵
님, 지난 페이퍼에서 소개했던
『얼토당토않고 불가해한 슬픔에 관한 1831일의 보고서』 읽어 보셨나요?
『얼토당토않고 불가해한 슬픔에 관한 1831일의 보고서』는
예고없이 다가온 슬픔을 마주하게 된 현수와
삶과 죽음 사이 멈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비일상적인 불행을 마주하고 난 뒤에도
일상을 지속하려 애쓰는 사람들이었죠.
이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견디고 버텨가며
다시 한 번 일어서보려고 했습니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책에서부터 나온 질문과 생각을 전달해볼까 합니다.
그럼, 형태소의 두 번째 페이퍼 시작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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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문장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느 날 어떤 문장을 읽고
내가 기다려 온 문장이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다.
_신형철, 『인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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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위의 글과 같은 경험을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어떤 문장을 읽다가 이 문장이 내가 기다려 온 문장임을 깨닫는 순간을요.
저는 마음에 드는 문장을 수집하는 걸 즐기는데요.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지? 싶은 문장들에 보통 인덱스를 붙이는 편입니다.
이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또.. 저는 친구들과 똑같은 책을 읽게 되면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 물어보는 것도 좋아해요.
같은 책을 읽어도 곱씹게 되는 부분은 각기 다르기 마련이니까요.
(전엔 친구와 똑같은 책을 들고 만나 밑줄 친 부분을 같이 비교해보기도 했어요!
즐거운 시간이었으니 한 번 해보는 걸 추천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질문으로
'책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혹은 문장이 무엇이었나요?'를 고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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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책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혹은 문장은 무엇이었나요?
🌵: 150p.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에 더 크게 공명한다. 세상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과 바깥 세계 사이의 경계가 남들보다 희미하다.
169p. 그 사진만으로도 그날 하루가 통째로 그려지는 듯했다. 그날 하루가, 그날들이, 그애의 삶이.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받은 모든 시간들이. 내가 본 건 사진 한 장이 아니라 거기에 멈춰 버린 선생님의 마음이었다.
🐬: 아버지가 혜진이를 놓아주자고 말하는 장면과 그때 ‘나’의 독백. 더 이상 찾지 않겠다는 말일까. 혹은 앞으로 혜진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지워 버리겠다는 말일까. 그게 지운다고 지워지는 걸까. 지워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찾지 않을 수 있는 걸까.(p.82) / 나에겐 나만의 방식이 존재한다. 나는 혜진이를 기억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거고 아버지가 하지 않는다면 내가 혜진이를 찾을 거다. 죽을 때까지 그럴 거다.(p.82) / 비일상이 끝나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다. 비일상의 상황에서 일상을 지속한다고 일상이 될 수는 없는 거다.(p.83)
선생님이 ‘나’에게 해 준 말들. “불행이 다가오면 움직여선 안 돼. 반응하지 말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지. 아침밥 먹고 점심밥 먹고 저녁밥 먹고. 최대한 그대로 지속하는 거야. 모든 것을. 알겠어?” 도망치지 않아야 도망칠 수 있다고 선생님은 덧붙였다.(p.98) / 선생님은 전에 그런 말을 했다. 언젠가 헤어질 줄 알면서 만나고, 언젠가 끝날 줄 알면서 사랑하고, 언젠가 죽을 줄 알면서 사는 것.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다들 그런 것쯤은 견뎌 가며 살아가는 갈까. 영화의 결말을 스포하면 사람들은 화를 내면서 이토록 끝이 분명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지. 허무주의에 빠지지도 않고.(p.124)
🎉 :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선생님은 말했다. 사람들은 빈방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소중한 것이 빠져나가 버렸지만 버릴 수 없는 빈 방이 누구나 하나쯤은 있는 거라고. 선생님의 말에 다 동의할 수 없었지만 어떤 사실 하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169p)
무엇이 ‘인간적’인지 논하는 것은 오랜 쟁점으로 남아 있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계측과 법칙이 통하지 않는, 제멋대로에 불완전 덩어리인 것들에서 인간을 발견한다. 감정이라는 것은 다분히 인간적이다. 사람마다 다양한 발현 지점과 강도를 가지고 찾아온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기쁨은 짧게 우리를 스치고, 대부분의 슬픔은 끈질기게 우리를 옭아맨다.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기를 써도 거기에는 슬픔이 있다. 그런데 사실 그 슬픔의 발견이 꼭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의 내면에 가장 모질게 굴 때가 있다. 조금은 그 그림자를 용서해주어도 좋다. 삶이 각자의 지옥인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 : 어떤 얼토당토않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심지어 세상이 끝나거나 전 우주가 통째로 사라져도 스누피가 반드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올 것임을 알았기에 안도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 “학교는 빠지지 말라”는 아버지의 문자를 받은 뒤 이어지는 현수의 다짐이 기억에 남는다. “비일상이 끝나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다. 비일상의 상황에서 일상을 지속한다고 일상이 될 수는 없는 거다.”라는 다짐이다. 학교를 다니고 가족이 한 집에 사는, 매우 일상적인 삶이 혜진이를 ‘놓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현수의 죄책감에 마음이 아팠고,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 대하여 고민하게 만든 장면이다. 상실로 인하여 깊은 슬픔에 빠진 사람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상실 이전을 ‘일상’이라 칭한다면 일상으로의 회복은 불가능하리라. 그저 상실을 마주하고, 기억하며 ‘덜’ 고장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자 극복이 아닐까. 친구에게 “얼른 돌아와”라는 식의 위로를 건넸던, 지난 날의 나와 이 장면을 함께 보고 싶다.
🕯️: “하지만 고통의 전이라는 감각을 아는 게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은 묘하게 위로가 된다.”
썩 좋지 않은 느낌을 나만 알고 있는 건 분명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인해 묘한 우월감이 생긴다. 나만 아는 상태를 지속하고 싶으면서도 주변 사람들이 내 속을 알아 주길 바라는 이상한 태도를 가지게 된다. 저 문장은 모순된 태도에서 벗어나면 위로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럼으로써 지금에 고여 있지 않게끔 동기를 부여하기에 기억에 남는다.
📌 : 장면으로는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현수에게 묵주를 건네는 장면, 그리고 호텔 매니저가 혜진이와 현수에게 보여주는 정중한 지지가 떠오른다. 문장은 수민이의 "신의 계시야. 넌 소수처럼 단단해질 거야 절대 쪼개지지 않는 건 소수랑 탄소, 그리고 최현수 너야."(P.205)가 인상 깊었다.
🎅 : 헤렌 산토스는 살아있다는 장면. 작품을 읽는 내내 산토스와 혜진이는, 정확한 생존여부를 모른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한 인물이라고 생각됐다. 선생님은 산토스가 살아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는 미궁에 있을 때 빛나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신비로운 존재에 더욱 열광한다. 산토스가 마술로서 끝을 마무리했을 때, 혜진이를 봤다는 증언이 있었을 때. 그러므로 전자가 여전히 미스터리한 인물로서 남아있어야 그녀의 생존을 얄팍하게 나마 희망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더 이상 가상이 아닌 현실의 인물로서 제자리에 돌아왔을 때 그녀 역시 가족의 품으로 향했다. 프로그램 ‘서프라이즈’는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소개한다. 외계인을 보았다 거나 죽었던 사람이 돌아오는 사건 말이다. 그런데 이미 대부분의 사건이 거짓임을 우린 모두 알고 있다. 그래도 본다. 혹시 모르니까, 즉 일말의 희망 덕이다. 그 가냘픈 지푸라기가 끊어질 때 시청을 포기한다. 실종 후 일주일이 지나면 아이를 찾지 못할 확률이 89%다. 혜진이네 가족은 아이가 살아 있지 않음을 직감적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남아있는 11%의 확률을 믿는다. 희박한 확률에 집착하는 둘은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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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청소년 소설이라는 걸 보고
조금은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장면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그랬던 걸까요?
이 책이 왜 청소년 소설로 쓰였을까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현수가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며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아가게 되잖아요.
얼토당토 않는 슬픔이 불쑥 찾아온다면
그 슬픔을 견디게 하는 사랑 또한 갑자기 찾아오는 것처럼
손을 맞잡으면 슬픔의 바다를 헤쳐나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는 조금 달랐으면 하는 마음이 담겨있을지도 몰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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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책을 읽고 난 뒤, 꿈꾸게 된 미래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 우리에게 닥친 슬픔에 대해 충분히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책이 쓰여지지 않았을까싶다.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고 울 수 있는 사회가 존재했으면 좋겠다. 죽음과 비극을 마주함으로써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도 필요하다. 이러한 모습이 부자연스럽지 않은 사회를 보고싶다. 최근 읽은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라는 책에 ‘모든 것을 해소하지 않고서 어떻게 슬픔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문장이 있었다. 충분히 애도할 수 있고 회복할 수 있는 기간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 나에게 주어진 불행을 잘 극복하면서도 타인의 슬픔을 헤아리는 사람으로 나아가기.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로 귀결되지 않고, 내가 살아가는 것이 고되고 힘듦을 인지하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그런 자세를 갖춘 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또 삶으로 구현하는 것.
🎉 : 그저 살아가는 것만이 중요하다면 외면과 회피는 간편하고 좋은 해결방안인지도 모른다. 밥 먹고 돈 벌고 시간 때우고 가끔은 치킨을 시켜 먹으면 사는 덴 지장이 없으니까. 문제는 우리가 그저 그렇게만 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마음 속에 있는 ‘빈 방’은 뻥 뚫린 공간처럼 작은 바람도 더욱 아리게 만든다. 체념과 용기는 다르다. 그리고 용기는 꼭 긍정과 연결되지 않는다. 그 빈 방이 있음을 알고 그 공간을 살피는 것. 그것은 분명 용기이고 후퇴가 아닌 커다란 진전이다.
책 후반부에서 수민은 현수가 용감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소설이 가슴 한 편에 따스하게 자리잡는 이유는 꼭 현수 뿐만이 아니라, 소설 속 인물 모두가 용감하기 때문이다. 현수의 용감함을 짚어주는 수민, 치료를 받기 위해 떠난 미스터 서프라이즈, 혜진이의 사진을 매일 바라보았던 호텔 그랑블루의 매니저, 현수의 2%와 그 어머니, 아버지의 98%. 그 모든 마음은 적극적으로 슬프고 그래서 단단하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단단한 내 자신이 서있을 미래를 꿈꾸게 된다. 어둠을 지나 ‘진짜 별로’인 나와 정말로 화해할 수 있을 그 순간을.
🍉 : 현수의 어머니가 세상 사람들의 따뜻함을 아직 믿고 계신 것처럼, 이 세상이 조금은 더 따뜻한 곳이었으면 한다.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길을 걷다 부딪힌 사람에게 사과하기, 화면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걸 인지하기, 고운 마음으로 좋은 말 주고받기 같은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일들을 보고 듣는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최근 SNS를 보다보면 사람들을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거나 무차별적인 폭언을 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낳고 한 사회를 혐오의 굴레로 빠뜨린다. 사람이 사람답게 대우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길 바란다.
☂️: ‘어른 됨’에 대한 기준의 연장선에서 이야기해보자면, 슬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곁에 존재하는 미래를 꿈꾼다. 소설 속 등장인물을 예로 들자면, 어린이집 원장선생님과 호텔 총괄 매니저가 있겠다. 현수와 혜진이를 위해 기도하는 원장선생님, 혜진이를 기억하고 기다리는 호텔 총괄 매니저는 주인공 현수를 살아가게 하고 나아가게 한다. 곁에서 함께 슬픔을 나누는 ‘서 선생님’과 ‘수민’ 또한 그렇다. 자신에게 닥친 직접적인 비극이 아니더라도 애도하고 기도하며 또 기억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공백을 인정하고 슬픔에 마주하는 일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 개인적으로는 내 슬픔 중 하나가 완결되어도 나는 여전히 존재하는 미래를 꿈꾼다. 즉, 슬픔을 내 전부로 생각하지 않는 미래를 기다린다. 슬픔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으면 그것이 내 정체처럼 느껴지고는 한다. 그래서 계속 슬픔을 유지할 수 있게 자학한다. 그러나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는 깊은 슬픔에 잠겨 있던 인물들이 과거를 묻고 나아갈 때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다. 이번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걸 이뤄가고 싶다. 공적으로는 슬픔의 크기를 재려고 들지 않고 서로가 슬픔을 해소할 수 있게 돕는 미래를 꿈꾼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슬프다. 하지만 그들은 남의 슬픔을 대면할 때 자기 것과 비교하지 않는다. 너도 슬프구나, 하고 이야기를 들어 준다. 서로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은 소설에만 존재하는 일이라 해도 그 과정만큼은 설득력 있다.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상상으로써 탐색한 듯하다.
📌 : 말보단 행동으로, 연대를 실천하는 방식을 체화한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를 꿈꾼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에게만 온전한 슬픔이 있겠지만, 두 아이가 서로의 마음에 조심스럽게 다가간 것처럼 서로에게 다가서는 태도가 지금보다 더 귀한 가치로 대우받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 : 어떤 어린이도 슬퍼하지 않는 사회. 어려서부터 유난히 아동학대에 예민한다. 물론 누구나 충분히 날카로워지지만 난 분노의 정도가 크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아동은 사회의 최우선 보호 대상이다. 어떤 아동도 자신이 원해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부모는 이들을 올바르게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다. 엄마는 처음이라, 아빠는 처음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이들을 싫어한다. 자식도 처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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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슬픔과 괴로움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슬픔을 혼자 짊어지려고 하는 이들에게
때로는 타인에게 기댈 수 있어야
나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었더라면
덜 슬프고, 덜 힘들었을지도 모르는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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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책을 읽고 난 뒤, 떠오르는 사건과 그에 대한 생각을 간단하게 적어주세요.
🌵: 책 속에 ‘마침표가 찍힌 비극에는 관심이 없는지 언론은 조용했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표현이 무척 와닿았다. 마침표가 찍힌 수많은 비극들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참사세대’라는 말이 생길 만큼 우리에겐 큰 참사들이 자주 찾아왔다. 그러나 그 수많은 비극이 어떻게 종료되었고 희생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관련 법이 제정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 책이 왜 청소년 소설로 쓰일 수 밖에 없었는지 생각해본다면.. 슬픔을 기억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진정한 애도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 아버지가 혜진이를 이제 놓아주자는 말에, 그럴 수 없다고 무작정 이전에 다녔던 어린이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그 전까지는 투명인간에 가깝게 살아가고, 그러기 위해 숨죽였던 ‘나’가 본격적으로 행동을 시작했다. ‘나’는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에게 덮친 비극의 잔해에서 허우적거리기보다는 그 비일상의 순간을 통과하기 위해 나아간 것이다. 이 통과의례와 같은 장면을 통해서 ’나’는 청소년기라는 과도기 속에서 한층 더 성장한다. 분명 삶을 살아가면서 전모를 알지 못한 채, 그저 있는 그대로 흘려보낼 수밖에 없는 일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내 삶을 관통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미결 상태로 잔존한다면, 이를 풀어 헤치기 위해 기꺼이 다가가는 것이 마땅한 삶의 자세 아닐까.
🎉 : 지난 7월 11일은 외할아버지가 떠나가신지 49일이 되는 날이었다. 엄마는 외삼촌들과 이모에게는 알리지 않고 몰래, 집에서 조금 떨어진 외할아버지의 산소에 다녀왔다. 일을 쉬고 동행할까 물어보니 엄마는 괜찮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잠깐 혼자일 수 있도록 두기로 했다. 5월 말에, 외할아버지의 친손자인 사촌 동생은 영정 사진을 들어야 했으므로 나는 외손자로서 할아버지의 유골함을 받아 들었다. ‘하늘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화장터였다. 사람이 한 줌의 재가 되는 시간은 잴 수 없기도 하고 잴 수 있기도 하다. 1시간 남짓이면 되는 거였다. 장의 버스에 올라타 산소로 향하면서 나는 그 나무 상자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자연에게 이 상자는 그저 가공된 목재에 불과할까. 엄마에게는 모진 아버지였고 나에게는 어렵기만 했던 외할아버지였던, 한 사람이자 집안이었던, 더는 형용하기 힘든… 괜찮은 일이 늘었으면 좋겠다. 다가오는 허리케인에도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중요한 것을 말할 수 있는, 누군가를 다독이며 함께 나아가자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 : 책을 읽고 무심코 네이버 뉴스란을 들어갔다가, 부모가 밭일을 나간 사이 집에 있던 어린 아들과 할머니가 집에 난 불에 목숨을 잃은 사건을 보게 되었다. 책을 보고 난 직후라 그 가족의 아픔이 더욱 크게 와닿았다. 내가 보는 것은 몇줄의 사건 기사와, 조금 더 관심있게 찾아본다면 사건 피해자들의 인터뷰 정도일 것이다. 내가 마주한 그 장면들 뒤의 일상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다. 생각은 했지만 막연했다. 그들에게도 시간은 흘러가고 일상은 진행된다. 그들의 일상에 대한 세심한 관심과 지원이 더욱 보장되었으면 한다.
☂️: 한 달이 채 지나지도 않은 서울 시청역 교차로 차량 돌진 사고가 떠오른다. 서울에 있다는 이유로 걱정의 문자를 받았었고, 이 문자는 걱정에 대한 고마움과 동시에 사고 피해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다. 단순히 시청역 주변을 걷고 있어서 사고 피해자가 되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원인이 아직 특정되지 않았지만 밝혀진다 하더라도 떠난 피해자들이 되돌아올 순 없는 일이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피해자를 떠나 보낸 유가족은 모두 비일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더하여 충격적인 것은 돌진사고 추모현장에서 발견된 모욕적인 글들이다. 소설 속에 등장한 유튜버와 빛나의 증언에 대하여 얘기하는 일상 게시판 속 글들은 모두 현실보다 순화된 느낌이다. 애도보다 무반응을 바라고 싶어지는 끔찍한 말과 행위들이 여전히 애도가 필요한 현장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가 떠올랐다. 상실이라는 개념이 만연에 퍼져있음을 깨닫게 한 사건들이다. 아직은 개인적인 사건으로서의 상실을 겪어 본 적이 없다. 어쩌면 타인의 상실을 마주하는 일이 더 먼저 일어날지도 모른다. 각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인물들을 보며 상실과의 대면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미리 생각하기 시작했다.
📌 : 특정한 사건보단 근래의 모든 이슈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생각난다. 소설 중간중간에 삽입된 인터넷 반응들이 짧지만 강하게 남았다. 요즘 댓글 보기가 무섭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이럴 때일수록 소설이 가진 힘을 더 실감하고, 더 믿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알지 못하는 타인을 흥밋거리로 소비하는 것을 넘어서는 가장 단단한 길이다.
🎅 : 특정한 사건은 떠오르지 않는다.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저 같은 사회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슬퍼하고 추모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은 망각이라 했다. 사람들은 본인의 일이 아니라면 금방 잊는다. 범죄가 발생하고 희생자가 나타났을 때 대중의 폭발적인 공감은 최대 3일이라고 생각한다. 소수의 이들이 이를 계속 기억하고자 노력하지만 자극적인 이슈가 없다면 금방 묻히기 마련이다. 그저 좋은 어른이 되고픈 한 사람으로서 모든 실종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길, 모든 이들이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어떠한 폭력도 당하지 않기를, 모든 노동자들이 두려움 없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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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성 감독의 단편 영화 '현수막'은 15년 전 사라졌던 언니가 남겨진 가족에게 다시 돌아온 그날의 하루를 담고 있는 영화다. 어느 날 갑자기 곁을 떠난 가족을 찾기 위해 남겨진 가족들은 곳곳에 현수막을 내건다. 막연하지만 간절했던 기대가 막막한 상심으로 바뀌어가는 지난한 시간이 흐르고 딸을 찾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다. 남겨진 동생과 어머니는 상심 속에서도 현수막을 내걸고 언니를, 딸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포기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현수막들은 사라질 것이고 어떤 현수막들은 남아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해결이 되는 일도 있을 것이고 여전히 미결로 남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간절함으로 스스로가 현수막에 새긴 마음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어떤 마음을 새겼는지 그 현수막을 걸었던 이들은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_진명현, <[영화觀] 마음을 건다> 칼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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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얼토당토않고 불가해한 슬픔에 관한 1831일의 보고서』를 읽으며
생각났던 칼럼의 일부를 가져왔습니다.
현수막 앞을 지나갈 때마다
이 글이 생각날 것 같았어요.
어떤 현수막들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겠구나 싶기도 했고요.
현수막의 글귀를 어떤 마음으로 새겼는지 전부 헤아릴 순 없겠지만,
『얼토당토않고 불가해한 슬픔에 관한 1831일의 보고서』를 읽는 동안
현수의 슬픔은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쌓였던 슬픔들도 보내줄 수 있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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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형태소의 두 번째 페이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여름도 행복하길 바라요.
<형태소 페이퍼>는
매달 둘째주, 넷째주 목요일에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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