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위에서 답한 시와 시 구절이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가끔 내가 망가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도려내고 싶거나 혹은 이미 누군가의 손길로부터 난도질 당한 것만 같은 감각. 싹이 난 감자처럼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듯한 기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 같은 것은 없기에 여전히 이 상태로 살아나가야 한다는 사실에서부터 오는 숨막힘.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로 “오늘”을 살아가는 자의 쓸쓸한 감각이 잘 형상화된 시라서 기억에 남았다. 특히나, “진짜” 나와 거짓된 나 사이에서 방황하는 듯한 시 구절이 인상 깊었다. 단 하나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태도가 나를 좀먹게 할지라도, 그리하여 망가지더라도 여전히 나로서 살아간다는 결연한 의지가 돋보였다.
「슈톨렌」의 경우, “찔리면 찔끔 피가 나는” “압정 같은 기억”을 지녔을지라도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으며, “물크러진 시간”도 오래오래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는 구절이 위로로 다가왔다. 누구나 깨진 유리조각 같은 기억을 품에 안고 살지만, 그 기억에 계속 베일 필요는 없다는 것. 아픈 기억도 아름다워질 수 있고, 또 그렇게 달콤해진다면 견딜 만한 것이 된다는 것. 불가능하게 다가오는 역설적인 진술이 마음을 어루만졌기에 눈에 띄었다.
「열과(裂果)」는 이 시집에서 수록된 시편들 중 가장 좋아하는 시다. 여름이라는 계절에 대한 나의 기억과 공명하기 때문이다. 어떤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일단 지나가야 한다. 그 지나감이 “흘러간 것”일 수도, “보낸 것”일 수도 있지만. “돌이 되어 가라앉”는 시간과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치”는 시간으로 이루어진 여름은 나에게 망가짐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여름이라는 시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과 같으므로.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지나간 여름을 되돌아보기. 그리하여 “슬픔”으로 무성한 “나의 과수원”을 바라보기. 이 모든 풍경과 진술이 한데 묶여서 여름이라는 계절을 잘 형상화하고 있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다.
🌵: 기억에 남는 구절이 너무 많았다.. 광화문 글판에서 본 구절을 마주했을 때도 (너무 좋아서)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고 ㅎㅎ… 그래도 이 시집을 어떤 시로 기억해야 한다면~ <빛의 산>이 아닐까 싶었다. 사실 나에겐 ‘빛의 산’ 같은 것들이 좀 많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이 시가 무척 반가웠다. 내가 기다리던 문장처럼 느껴져서.
실은 아주 가까이에 빛이 보이지만 멀리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곳에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했다는 말처럼... 별일 아닌 걸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그것을 실패할까봐 두려워서, 제대로 못 할까봐 겁이 나서 도망치는 일들이 많았다. 오래 고민하고 시도하다 보면 안전하게 진입하는 방법을 알게 되지만… 갈 수 있는 길이 좁아지게 된다. 더이상 빛의 산을 바라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길을 잃더라도 돌아가더라도 들어가 볼 것이다.
🎉 : 누군가는 ‘시가 밥을 먹여주냐’는 익히 들어온 종류의 말로 나를 흔들려 들겠다만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고자 한다. 시를 읽고 쓴다는 것은 우리 삶의 목적에 있어 그저 먹고 자는 기본적 욕구 충족의 차원 너머의 무언가, 그 중요한 세계가 있고 그곳으로 수렴하려는 노력이 우리를 위대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의 연대선언이다.
좋은 시는 끝없는 변화 속에 휘청이는 나의 존재 위치를 짚어주고 흐려진 나의 중심을 재정립해준다. 많은 시들이 절망과 슬픔에 의해 단련되어 세상에 나온다. 슬픔은 나약함이 아니다. 문득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슬픔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런 모순을 생각한 적이 있다. 인간됨의 중심부에는 그렇게도 많은 모순들이 있다. 강인한 사람이 되고자, 누군가의 깊은 성찰과 반추를 곱씹는다. 누군가의 세계를 마주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위로를 준다. 세상엔 이런 섬세함이 있구나. 어쩌면 나는 외롭지 않구나. 내게 <추리극>이 그런 시였다.
🍉 : '믿을 수도 있었는데 왜 믿어진다고 생각했을까' 이 문장을 읽기 전까지는 ‘믿을 수도 있다’와 ‘믿어진다’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믿어진다’라고 쓰였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이 문장을 읽으니 ‘미래가 담겨 있다고 해도 믿어질 것 같다’가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조금 느슨하게 만들어보세요 손에 자꾸 힘을 주면 목을 감싸는 게 아니라 조르는 것처럼 느껴질 거예요 그는 거실 구석에 놓인 털실 뭉치와 뜨다 만 목도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완성을 바라는 마음이 거기 있다' :
요즘 뜨개질을 다시 시작했다. 어릴 적 뜨개질을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9살 때 열심히 만들어 할머니께 처음 선물해드렸던 목도리는 너무 뻣뻣했다. 왜 내가 만든 목도리는 다른 목도리들 같지 않고 이렇게 뻣뻣할까 생각했었다. 이 시를 보니 알겠다.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오늘은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가는데, 처음 하는 곡을 며칠만에 연습해내려니 리허설을 가기 전부터 숨이 막혔다. 잘해야 하는데 잘해야 하는데… 시시때때로 잘해내야 하는 일들 앞에서 숨이 막히고 손에 힘이 빠지던 순간들이 함께 떠올랐다. ‘완성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구나. 몸에 힘을 빼자.
☂️ :가끔은 내가 떠난 후, 남겨진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상상해본다. 기억 속에 오래 남고 싶다는 욕심과 금방 털고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공존하는데, 안희연 시인의 시 「덧칠」은 이런 모순적인 나의 바람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알려주는 것만 같다. 떠난 ‘나’는 남겨진 ‘너’에게 환한 시간만을 펼쳐 보이고 싶지만, 남겨진 이는 싹을 두려워하며 흙만 채운 화분에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기를”(「덧칠」) 뿐이다. 끝내 정점을 찍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자신의 손이 손 모르게 그렸던 얼굴을 흰 물감으로 뭉개는 ‘너’의 모습을 드러낸다. ‘흰 물감’을 선택한 이유를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괜찮아지려 덧칠로 얼굴을 뭉개보지만 결코 다른 색으로는 칠하지 못하는, 다시 그 위에 얼굴을 그리게 될 것임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 남겨진 이가 상실을 마주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태도가 아닐까. 이 구절을 곱씹다보니 가끔 했던 상상이 현실이 될까 두려워진다. 물감의 색을 고민하다 매번 흰 물감을 고르는 일은 내가 하는 편이 좋겠다.
🕯️ : 각자의 작은 세계는 호두 껍데기처럼 울퉁불퉁하다. 두께가 제각각이라 어딘가는 쉽게 깨어진다. 그곳이 깨어지면 다른 세상이 침입하거나, 내가 그 세상에 발을 들이게 된다. 시는 늘 그것이 품은 문장으로 세상의 얄팍한 부분을 세심히도 두드린다. 또 두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만나지 못한 사실이나, 내가 잠시 깜박했던 사실을 시가 알려줄 때마다 그 시와 구절을 곱씹게 된다.
재작년에는 비가 올 때마다 창틀에 페트병을 끼워두었다. 페트병 비우기를 깜빡하고 화들짝 놀라 창틀을 보면 적어도 30분은 그 창틀에 붙어서 일을 수습해야 했다. 지금 자취방에는 숟가락이 세 개다. 한 번 설거지를 잊으면 쓸 숟가락이 없다. 설거지를 해야만 다음 끼니를 충분히 챙길 수 있다. 다음을 위해 꼭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은 사소하고도 중대한 것이다. 마치 저 시의 구절처럼 말이다. 비슷한 일상의 장면을 깨고 그다음을 본 구절이 신기하다.
🧋 : 열과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기후변화로 인한 생리장애이다. 해결방안은 열과피해가 더 발생하지않도록 빨리 수확하는 것 밖에는 없다. 다시 되돌리거나 사전에 100%의 예방은 불가하다.
자라오면서 무언가를 깊게 담아두는 내가, 혹은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내가 불만족스러웠다. 그동안은 어른이 되다는 건 성장할수록 부딪친 일을 해결해나가는 법을 익히고 능숙히 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저 그와 비슷한 일의 경험치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리고 난 그것이 서러웠다.
이 시집은 우리가 겪어야만 했을 그 일을 ‘몫’이라 받아들인다. 또한 좋은 문지기란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 명명한다.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나를 빙둘러 공감하면서도, 더럽혀진 지금의 바닥부터 다시 사랑할 것을 제안하는 이 시의 온기가 나와 잘 맞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