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4 형태소 페이퍼 6호
의미를 갖춘 가장 작은 단위인 형태소
행간 사이에 오래 머물며 마주한 생각을 나눌 예정입니다.
책을 읽고 싶은 분들 누구나 함께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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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시나요? 9월의 자립형태소 야호🎉 입니다.
어떤 자리에서 이 메일을 읽고 계신가요?
침대에 누운 자리에서? 아니면 쌀쌀한 10월 말의 거리 위에서?
저는 이 형태소 페이퍼를 쓰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여러 메일링 서비스의 구독자이기도 한데요,
또다른 하루를 위해 부랴부랴 올라탄 지하철 안에서 메일을 받으면
틀에 맞춘 삶 속에서 즐거움을 주는 하나의 ‘작은 변화’처럼 느껴져서
미소를 지으며 메일함을 열곤 합니다.
이 메일이, 님께도 그런 순간이었으면 하는 작은 기대를 품습니다.
지난 페이퍼에서 추천드렸던 에세이집이 있습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읽어보셨나요?
품에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 어김없이 슬슬 그 꽁무니가 보이는 연말,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독서는 그 속에서 우리를 곧고 단단하게 합니다.
삶의 여러 단면을 조명하는 김영민 교수님의 시선을 통해
각자의 발걸음을 점검하는 시간이었길 바랍니다.
형태소가 이 책을 읽고 이야기했던 것들을
여기에 공유해드리니, 기회가 된다면
님의 생각도 꼭 공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여섯 번째 형태소 페이퍼를 보내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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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물상에 자기의 삶을 투영하게 된다면, 그것에 우리의 삶에서 이미 일어났던 어떤 사건, 만났던 어떤 사람, 겪었던 어떤 감정 등을 자극하고 환기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그 물상은 전적으로 미지의 존재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나마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의 반복적 출현이다.
_윤경희, 『쿠라의 영향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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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장은 구병모 소설가의 단편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에 실린 윤경희 문학평론가의 해설에서 따왔습니다. 김영민 교수의 에세이들을 읽으면서 님은 어떤 생각을 했나요? 감히 예상해보는 것이지만, 저는 님께서 한 번쯤은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거나 앞으로의 삶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난 페이퍼에서 ‘풍요로운 독서 경험’이 될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거짓말은 아니었죠? 정말 다양한 주제와 형식을 가진 글들이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한 서울대 교수님의 삶이란 ‘보편’과는 거리가 멉니다. 글의 주제도 다채롭습니다. 그런데 저자의 에세이들이 자꾸만 우리를 성찰의 세계로 이끄는 것은, 이리저리 주제를 옮겨다니는 글들이 모두 우리 삶의 한 조각을 깊게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형태와 굴곡은 다른 타인의 삶을 읽어내려 가면서도 각자는 스스로의 삶을 떠올립니다. 그것도, 저자가 제시하는 색다른 각도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독서를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핵심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에 더해 저자의 글은 적극적으로 독자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각자에게 모두 다른 의미로 다가갈 수 있는 책인 만큼, 저는 자립 형태소로서 형태소 멤버들이 특히 어떤 글에 주목했고, 거기서 어떤 의미를 발견했는지 가장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책에서 가장 재밌었던 파트와 기억에 남았던 문장’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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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책은 일상/학교/사회/영화/대화 주제의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장 재밌게 읽었던 파트는 어디였나요? 간단한 선정 이유, 기억에 특히 남았던 문장을 포함하여 적어 주세요.
🎉 : “상처도 언젠가는 피 흘리기를 그치고 심미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성장이,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구원의 약속이다.”
책의 각 파트는 각자의 매력으로 가득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어도 나는 자꾸만 처음의 ‘일상’파트로 한 번씩 되돌아가 보고는 했다. 일상 파트는 다른 파트들에 비해 뚜렷한 주제의식이 없지만, 그 자유분방하고 조금 힘이 풀린 채 나오는 위트가 빛나는 글들은 어쩌면 사람의 인생 전체를 겨냥하고 있다. 글을 읽고 있자면 인생의 덧없음을 새삼 재확인하지만, 그럼에도 주어진 것들에 있어 내 자유와 의무를 다해 침착하고 느리게,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는 왠지 모를 희망으로 마음이 채워지는 것 또한 느낀다. 좋은 어른에게 진득한 지지를 받은 것 같은. 그런 기쁨이다.
🌵 : 186p. 실로 사람들은 과거에 존재했던 것만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존재해본 적이 없는 것도 그리워한다. 부재를 견디고 그리워하는 것으로 소진되는 생. 지친 사람들은 낮은 곳에 모여, 파울 클레와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한 “새로운 천사”를 그리워한다.
사회 파트를 읽을 때는 조금 더 오래 곱씹게 되었다. 내가 겪지 못한 일도 있었고 내가 겪었기에 더 기억에 남는 일도 있었다. ‘부재를 견디고 그리워하는 생’이라는 표현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산문집 내내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쓰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저 표현이 더 기억에 남는 듯 하다. 형태소 10월 글에서 사랑의 본질에는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있다고 쓴 적이 있다. 그 글도 생각이 났고.. 겪지 못한 것, 존재한 적 없는 것을 그리워하는 인간의 마음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보고 싶어 졌다.
🍉 : 아무래도 현재 나의 신분이 대학생이다 보니 학교 주제의 글들,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남은 부분들을 몇 가지 공유하고자 한다. 첫번째는 수업을 마치고 즉흥적으로 지리산에 갔다는 일화다. 학창시절 줄곧 어머니의 대학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대학의 낭만을 꿈꾸며 자라온 나는 어머니가 동기들과 무턱대고 지리산을 올랐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힘들고 어려운 길이지만 잘 몰랐기에 서로 의지하며 보낼 수 있었던 그런 추억들… 아직까지도 그런 낭만은 내 마음 속 한켠에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과 꼭 닮은 일화를 책에서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어떻게 일정을 맞춰서 갔지?!”하는 물음이었다. 당장 사람들을 모아 가보자고 할까 생각해보았지만 각자의 수업, 알바, 과외, 학회들이 머리를 가득 채우는 걸 보며 묘한 감정이 들었다.
두번째는 ‘신입생들을 위한 무협지’ 편에서 다룬 대학 생활에서 멀리 해야 할 다섯 가지(꿀강의, 연환계, 사이다, 국뽕, 암기구토)다. 대학의 끝자락에서 나는 지난 4년, 휴학까지 센다면 5년이라는 긴 시간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곱씹고 있다. 5년이라는 시간 안에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그동안 나는 무엇을 쌓았는지, 나는 여기서 어디로 나아갈 수 있을지 하는 생각들 말이다. 국문학을 전공하면서도 국문학 전공이라고 나 스스로 쉽게 자부하지 못하는 상황 앞에서 그동안 학점에 연연하며 소위 말하는 ‘꿀강’들만 골라 들고, 시험 직전에만 바짝 공부하고 뒤돌아서면 잊어버렸던 지난 날들이 떠오른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이미 다 지난 일이니 마지막은 ‘2월의 졸업생들에게’ 편에서 언급된 ‘뭔가 귀중한 것을 과감하게 소비한 혹은 낭비한 졸업생’이라는 표현이다. 오늘 마침 교수님께서 20대만큼은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무엇이 됐든 여러 방면에서 열과 성을 다해 쏟아보고 경험해봐야 한다는 그런 말이다. 비록 20대가 절반 남긴 했지만 미래에 대한 고민은 저멀리 제쳐두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하자며 여기저기 마음껏 돌아다니고 또 동시에 많은 것들을 꿈꾸고 계획했던 20대 초반이 이렇게 지나갔다는 것에서 유독 저 ‘뭔가 귀중한 것을 과감하게 소비한’ 사람이라는 말이 콕 박혔다. 그만큼 대학시절은 두고두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시간들일 것 같다.
☂️ : 일상 : ‘시간의 흙탕물 속에서’라는 소제목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인생을 기대하며 살아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물이 더 탁해지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흐려진 시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이 파트를 접하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나의 헛된 기대를 꼬집는 문장, 흙탕물이 당연하니 무던하게 잘 가고 있다는 덤덤한 응원이 느껴지는 문장, 정신을 바로잡게 하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재치 있게 튀어나온다. 그중 ‘설거지의 이론과 실천’에 등장하는 “잘 씻고 살기 바랍니다. 그러지 않으면 역사의 설거짓거리로 전락하게 될 테니까.” 라는 문장이 섬뜩하다. 더 나은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위하여, 현재와 내일을 위하여 신체와 정신 설거지를 건너뛰지 말아야겠다. 평소에 잘 안 씻고 다녀서 섬뜩했던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 : 요즘 진학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어서 ‘학교’ 파트가 흥미로웠습니다. 공부를 오래 한 고학력자 특유의 유머와 냉정하기에 따스한 마음으로 제자 대하듯 조언하는 말들이 많이 와닿았습니다. “그러나 애써 시험공부를 해서 기왕 대학에 들어왔다면, 반드시 지식을 통해 머리에 전구가 들어오는 경험을 해야 한다. 자루에 갇혀 있다가 튀어나온 고양이처럼 그러한 사치스러운 지적 경험을 찾아 캠퍼스를 헤매야 한다.”라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 : 대다수의 사람에게 정치란 이해하기 어렵거나, 얘기하면 진 빠지는 존재다. 아니면 다른 사람과 싸우고 싶을 때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척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그럼에도 일상과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회 파트의 글들은 이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늘 힘을 품고 있다. ‘그들은 올 것이다’라는 제목의 글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의 가슴에는 어떤 분노도 없다고 강조했다. 마치 그것을 강조하지 않으면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문장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정확히 현실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왜인지 잠시 문학 작품을 읽은 듯한 기분이었다. 다루기 꺼려지는 소재를 붙들어 놓는 데서 나아가 독자를 끌어온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 : 상처도 언젠가는 피 흘리기를 그치고 심미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성장이,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구원의 약속이다.(37p, 성장이란 무엇인가) 당장 아침부터 죽음을 생각하라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다 못해 뒤짚어버린 일상의 파트가 가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정세에 대한 무거운 걱정을 하면서도 학생의 울음앞에 무슨 말도 못하는, 누구보다 시시한 행복을 향유하는 작가의 연구실에 함께있는 친근감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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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9월이라는 당시 모임 시기에 맞는 질문을 꼭 넣고 싶어
특별 질문을 2번째로 준비했습니다.
제가 하필 ‘9월’의 책으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선택한 아주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김영민 교수의 가장 유명한 칼럼중 하나가 바로 <추석이란 무엇인가>이고,
바로 이 책에 그 글을 포함한 ‘추석’ 주제의 글이 3개나 실려 있다는 것이었어요!
이 메일이 도착할 10월 말이라면 사실 이제 꽤나 지나간 일이 되었지만, 9월에는 우리 모두가 추석을 관통했습니다. 책을 읽고 다시 떠올리자니, 님의 추석은 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이것도 형태소의 이야기를 먼저 읽어보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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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가족 구성을 가지고 있고, 그들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든지 간에. 개개인의 탄생이나 성장과 직결된 가족이라는 개념은 모두에게 필연적으로 삶의 무시할 수 없는 한 축이 된다. 더 넓은 세계를 향한 열망이 이동으로 표현되는 이 서울이라는 공간에 이방인으로서 존재하는 나라는 존재. PC방과 편의점 하나 없던 동네에서 성장해 도달한 이곳에서 나는 그야말로 이 시대의 피, 땀, 눈물을 느끼곤 했다. 콘크리트에 둘러 쌓여 각종 요구에 시달리다 보면 나는 어딘가로 내몰리고 그 공간에서 내가 기존에 느끼던 것들은 어느새 구석에 방치된 과거의 장식 같은 것이 된다. 명절은 내가 구석에 내던져 두었던 가치들을 다시 꺼내 먼지를 닦는 작업 같다. 고향, 가족,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던 것들을 관통하는 나의 구체적인 ‘근황’의 도출. 나는 그것들이 시시하고 무시해도 될 것들이라고 스스로 결론내 본 적이 없음에도 어느 샌가 그런 것 마냥 외면하고 있었고. 외면해오던 것과 마주하는 것은 불편함을 준다. 명절은 고지식한 가치들의 강화 작업이다. 하루 온종일 동안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노동에 시달리자니 그 중에선 분명 버려야 할 것도 많다. 다만 잊고 살았던 삶의 한 축을 재점검하는 건 20대 중반에 접어들고 나니 이따금씩 제법 소탈한 기쁨을 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번 추석에 차례는 ‘패스’하기로 한 외가 집안 결정에 오랜만에 만난 외숙모와 ‘나이스’를 나눈 나의 사례.
🌵 : 시골집을 지키고 계시던 증조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부터 우리 가족은 더 이상 친가를 갈 필요가 없어졌다. 친가가 사라졌다는 표현이 적합할지도 모른다. 이번 추석 역시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가족들끼리 국내 여행을 갔다. 강아지가 집에 온 뒤로 이번 추석이 두 번째로 함께 보내는 명절이었는데.. !! 묵게 된 숙소에 또다른 강아지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 강아지들과 다 같이 산책을 한 순간이 가장 명절 같은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뒷산을 걸어가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다른 친구의 냄새를 맡는 강아지의 신난 표정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시간이었다.
🍉 : 우리집은 친가와 외가 모두 경상남도에 위치해있어, 명절이면 차를 타고 7~8시간을 달려 반가운 얼굴들을 보러 갔었다. 친척들 중에서는 우리 가족만 멀리 서울에 살기 때문에 특히 더 반가움을 느끼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와 외할머니께서 동생과 나를 위해 명절마다 미리 준비해주셨던 음식들이 생각이 난다. 동생과 나는 어릴 때 우유를 물처럼 마셨는데, 할머니댁에는 우리가 집에서 늘 마시던 서울우유가 아닌 부산우유가 있었다. 하루는 동생이 그 우유를 마시고서는 서울우유와 맛이 다르다고 했는데 그 후 명절마다 할머니께서 서울우유를 어디선가 구하셔서는 우리를 위해 넣어두셨던 기억이 있다. 그때 당시에는 그 상황을 보며 당황했고 지금은 그런 투정을 부린 동생에게 딱콩을 한대 주고 싶으면서도, 할머니의 사랑에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된다.
☂️ : 추석 연휴가 끝나는 날에는 보름달을 보기 위해 항상 산책을 나간다. 눈치로 알게 되는 것들이 점점 늘어날수록 ‘명절'은 기도를 반복하는 날이 된다. 올해 추석 또한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 본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걱정은 되지만 꺼낼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외면하려 했던 걱정 거리들이 기회를 잡고 고개를 든다. 조부모님의 시간은 나보다 빨리 흐르는 듯했다. 노화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나. 그저 일년에 2~3번 보는 식구들이 건강하게 일상을 살아가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고 싶을 뿐이다. 보기만 해도 복이 차오를 것만 같은 보름달을 바라보며 작게 읊조린다. 한가위를 마주하면서 기대를 접으라는 작가의 충고를 뒤로한 채, 다음 명절에도 어느 소원보다 이루어지기 힘든 기대를 할 것 같다. 항상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건강하리라는 기대를.
📌 : 저는 개인적으로 대세 거스르기를 선호하는 사람입니다. 붐비는 지하철이 싫어서 저녁 6시 약속에 4시부터 가 있고, 6천만 인구가 일제히 명절을 기념하며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흐름에 편승하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설에도 본가에 가지 않았습니다. 샐러드 파스타, 커피, 책과 함께라면 어떤 기념일도 여상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제는 거의 명절 기념하지 않기를 기념 행위로 삼은 것 같기도 합니다.
🕯️ : ‘명절을 보내는 법’ 1편에는 명절의 고질적인 문제인 과도한 관심이 등장한다. 이번 추석 전에 이 글을 읽었던 터라 잠시 무시했던 걱정이 되살아났다. 이제 학교 성적이 아니라 취업 준비에 관해 이야기할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멋들어진 진로 계획을 세워둬야 꼬리질문에 당하지 않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걱정에 비해 나를 괴롭히는 질문이 적었다.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명절 쪼렙’이 된 기분이었다. 명절은 만남의 즐거움, 고향의 편안함을 두르고 있다. 그러나 혈연이 아닌 사람과는 좋은 것보다 고통을 나누며 같은 명절을 보냈음을 실감하지 않는가? 명절을 공통의 체험으로 만드는 감정은 무엇인지 문득 의문이었다. ‘명절을 보내는 법’만 해도 피하고 싶은 추석의 일면을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 : 왜일까 친척은 내 성장과정을 모두 알고, 심지어는 서로 숨기고싶은 치부까지도 아는 사이지만 그만한 거리감까지 동반하지는 않는 기이한 관계다. 어른npc 중 하나의 모델에 불과했다. 그리고 올해 명절에 나의 이러한 세계관이 붕괴됐다. 내가 중2병의 내가 아니듯 그들도 그때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제일가는 까탈쟁이였던 내가 너스레를 떨 줄 아는 어른과도기에 있고, 어린시절 악당이었던 큰어머니는 나 대신 작은아빠의 짖궃은 장난을 처치해주셨다. 시험을 핑계로 오지않는 사촌동생도 모두 자라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다. 이제는 문을 쾅닫고 들어가버리는 사춘기처럼 굴 수없어 서로서로 어색함을 누르고 대화를 한다. Npc의 세계에 동화되는 듯이 기묘한 상황들에 적응해가는 스스로도 어색하지만, 이제야 가족을 유지하고자하는 어른들의 노력이 같은 평면에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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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저자는 ‘해석’이라는 행위를 ‘자기 위안’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가 부여한 의미들을 통해, 이 황량한 세계를 그나마 살 만한 곳으로 만든다(266p)는 것이 저자의 설명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해석’ 내지는 ‘의미 부여’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점이 김영민 교수가 가진 인생관의 핵심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의 부분마다 의미를 부여하다는 것이 중요하다면, 적극적으로 그것을 시도해봐야 하겠죠.
그래서 저는 의미 부여에 대한 질문을 마지막 질문으로 삼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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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상수 초기 영화(2003년의 글이긴 하지만 하필 홍상수의 영화가 분석되고 있다는 점에서 내가 ‘흠칫’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난 아직 창작자와 창작물을 분리할 수 있을 정도의 위인은 아닌 듯.)를 분석하는 글(264p)에서, ‘해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왜 해석을 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는가? ⋯(중략) ⋯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불안해서 해석을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엄마를 찾기에는 이미 너무 커버렸으므로 이런저런 정교한 해석들을 통해서 자기 위안을 찾아 나선다. 그러한 자기 위안들을 통해서, 자기가 부여한 의미들을 통해서, 이 황량한 세계를 그나마 살 만한 곳으로 만든다.”
인생은 좀 단순하게 살아도 괜찮고, 실제로 그것이 더 도움이 되는 순간들도 많다. 하지만 그런 조언을 받아들였음에도 나는 이따금씩 나나 주변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깊고 복잡하게 생각해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뭐가 문제가 있나? 너무 예민한가? 싶었던 마음들이 위로가 된다. 나는 아마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너무나 이해하고 싶어서, 살만해질 수 있는 자기 위안을 위해 그렇게도 해석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것 같다. 실체 없고 대책도 없는 사람들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마음들은 그리하여 해석의 여지를 제공한다. 도통 이해 못 할 사람들도 있는 게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숨쉴 구멍들을 뚫고자 나는 염불 읊듯이 속으로 외치고자 한다. 나는 왜 이러나. 쟤는 왜 저러나.
🌵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다. 프롤로그부터 그 답이 있었고, 책을 읽을수록 저자의 생각에 닿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더 잘 살기 위해 죽음을 생각해보는 것. 어쩌면 버티는 것에 가까운 삶을 견딜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 역시 이러한 장치들을 만들고 죽음을 곱씹어가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수줍어 배시시 웃기만 하는 선한 심성만으로는 비전을 구현해낼 수 없다.’는 문장이 있었다. 대선 후보 토론과 관련된 글 중 일부분이다. 최근 어렴풋이 둥둥 떠다니던 생각들이 있었는데, 이 문장을 읽고서는 정리가 됐다. 선한 마음’만’을 가지고 살면 좋다고 막연히 생각해왔는데 그 마음으로 누굴 돕든, 행동을 하든, 연설을 하든, 법안을 내든 뭐든 간에 일단 그에 맞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똑똑하면서도 선하게 살아야 조금이나마 원하던 모습으로 살 수 있지 않겠나, 하고 정리했다.
☂️ :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명예와 돈에 대한 의미 부여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나 싶다. 명예와 돈에 대한 집착은 또 싫어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척도 해봤고, 돈과 명예는 중요치 않다며 내 정신을 세뇌시키려는 노력도 해봤지만, 돈과 명예가 있어야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평생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은 어느 정도 남아있을 것이다. 그래도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 지나온 인생을 바라보며 난 그래도 좋은 삶을 살았다고 만족하고 싶다. 돈과 명예가 아닌 다른 이유를 들면서. 내가 나의 삶을 부끄럽지 않았다고 평가하기 위한, 돈과 명예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기준을 세워보려 한다. 젊음이라는 시간을 낭비하며 할 일은 이 기준을 찾는 것이 아닐까. 돈과 명예는 생활을 이어갈 수준으로만 따라와주면 좋을 것이다. 이 또한 어려운 일이겠지만.
📌 : 저는 의식적으로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려고 생각하면서 사는 편입니다. 그러나 루틴한 삶을 유지하며 하루하루에 충실하자는 다짐이기에 오히려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삶과는 닮아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느꼈습니다. 어쩌면 모두가 가진 의미에 편승하지 않고 저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각자에게 중요한 무언가, 삶을 견딜만한 무언가가 주어진다면 방식이나 관습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 나는 예민하다. 환절기에는 피부가 일어나고, 일할 시간을 침범당하면 성질내고, 잘 때는 내가 움직여서 나는 소리조차 듣기 싫다. 예민하게 반응할 때 기력을 다 쓴 나머지 다른 부분에는 둔감해 지기도 한다. 주변 사람의 근황을 까먹거나, 식사라고 볼 수 없는 조합도 그냥 먹어버린다. 예민한 부분은 쉽게 상처가 난다. 둔감을 깨달으면 실망으로 인한 상처가 난다. 예민함이 여러 문제의 근원이고 나는 이를 싫어한다. 그런데 ‘광장으로’라는 글에서 조금 위로를 받았다. “체질상 굳은살이 생기지 않는 이들은, 각종 불의와 헛소리에 대한 알레르기를 지병으로 갖게 된다. 이들은 상시적 분노 상태에 있다.” 예민함에서 기인한 상처는 지속될 뿐 굳은살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불의와 헛소리에 익숙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이 된다. 저자는 이에 덧붙여 말한다. “이들의 분노는 고독한 독백으로만 표현될 뿐 함성이 되지 못한다.” 괜찮다. 이렇게 글이라도 쓰고 있으니까. 마음에 담고 있던 문제 여럿이 괜찮은 것으로 변해버렸다.
🧋 :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삶에 덤으로 받은 날들이다. 어차피 덤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그 와중에도 각자만의 전투를 헤쳐나간다. 그러니 너무 잔인해지지말 것. 모든 쉽게 생각하는 게 어려워, 쉬운 척 보이려 쥐고있는 주먹의 힘을 풀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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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가 끝이 있듯이, 인생에도 끝이 있다. 모든 이야기들이 결말에 의해 그 의미가 좌우되듯이, 인생의 의미도 죽음의 방식에 의해 의미가 좌우된다. 결말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동안 진행되어온 사태의 의미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은 제대로 죽기 위해 산다”는 말의 의미다.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삶은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음은 선택할 수 있다.
_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1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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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저는 책 속 김영민 교수님의 문장 하나를 더 가지고 왔습니다. 이 책을 정리하고 넘어가면서, 저 스스로 혹은 그 누군가를 위해 남기고 싶은 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의 문제와 관련 없이 과거는 지나가고, 현재는 존재하며, 미래는 다가옵니다. 하지만 님께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미래에 ‘죽음’을 포함시켜본 경험, 즉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본 경험이 얼마나 있으신가요? 이 책은 정말 다채롭지만, 그 모든 글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태도가 있습니다. 저자는 늘 삶의 ‘끝’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끝은 있다. 다가온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면 한 번은 들어보았을 사회탐구 영역의 대표격 과목인 ‘생활과 윤리’ 과목의 교과서 목차를 살펴보면, ‘삶과 죽음의 윤리’라는 단원을 볼 수 있습니다. 옳은 삶을 고민할 때 옳은 죽음은 한 데 묶입니다. 먼 과거의 철학자들도 삶과 죽음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뗄레야 뗄 수 없는 동반자로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두고 ‘부정적 생각’이라거나 ‘우울한 생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그것이 자의에 의했든 타의에 의했든 간에 지양해야 할 일입니다. 삶은 곧 죽음이기에, 어찌 삶에 대한 고민이 ‘나쁜 일’이 될 수 있겠는가와 더불어, 두려움과 맞설 때 우리는 그 너머의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눈을 뜨고 아침이 밝아올 때 가장 마지막의 어둠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저자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 각자에게 어떤 일이어야 하는가. 그런 질문을 님께 드립니다. 그 질문에 대한 무수한 답변에까지 생각이 가 닿으면서, 저는 이 책을 읽길 참 잘했다며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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